성모승천대축일 명동성당 미사 유감

1.
가톨릭 신자로써 8월 15일은 두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광복절입니다.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자 절망의 출발입니다. 또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2014년 8월 15일은 하나더 의미를 띱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집회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내와 같이 집회를 함께 했습니다. 광화문에 단식중인 세월호 가족들을 응원하자 했고 시청, 광화문, 명동을 찾았습니다. 덕분에 청주에 사는 대학 동기를 시청 광장에서 만났고 서울대교구에서 일하는 동기도 전화로나마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아침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있었던 ‘성모승청대축일 미사’를 인터넷중계로 보았습니다.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도 귀담아 들었습니다.

삼종기도중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로하시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은 모든 이들과, 이 국가적인 대재난으로 인하여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성모님께 의탁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당신의 평화 안에 맞아주시고, 울고 있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며, 형제자매들을 도우려고 기꺼이 나선 이들을 계속 격려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모든 한국 사람들이 슬픔 속에 하나가 되었으니, 공동선을 위해 연대하고 협력하는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신문 기사를 보고 노란리본을 하신 교황님을 보고 놀랍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아픔을 아직 진행형인 광복절. 명동성당 미사를 은근히 기대하였습니다. 지금은 퇴색하였다고 하지만 80년대 민주화세대의 성지였고 가톨릭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신자들, 아니 관광객들도 많아 보입니다. 명동성당 미사라고 하여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이라 조그마한 소리도 울립니다. 울림이 말씀을 거룩하게 하는 듯 합니다. 시작 예식이 끝나고 말씀의 전례. 복음 낭독 및 강론입니다. 과천성당에 새로운 신부님이 오신 이후 미사에 흥미를 잃었습니다. 강론 때문입니다. 주교회의가 춘계총회를 마치고 발표한 자료에 강론에 관한 부분이 있습니다.

“매번 동일한 표현과 내용이 거의 매주 계속해서 반복되는 강론,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똑같은 어조와 내용으로 이어지는 강론, 복음은 없고 예화만 잔뜩 늘어놓는 강론 등은 대표적인 무성의한 강론으로서 사제들의 분발을 촉구하였습니다.”

특별하지도 않았고 의례적인 강론으로 다가왔습니다. 교황께서 발표하신 ‘복음의 기쁨’은 강론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37. 다음의 진술은 기억할만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례로, 특히 성찬례에서 선포하는 것은 묵상과 교리를 위한 시간이라기보다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 대화에서 구원의 위대한 업적이 선포되며, 거룩한 계약의 요구사항들이 계속적으로 재론됩니다.” 강론은 성찬례에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합니다. 강론은 성사적 친교에 도달하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대화에서 최고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형식의 교리교육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강론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과 이미 세워놓으신 대화를 한 번 더 채택하는 것입니다.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의 공동체의 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어디서 하느님을 향한 열망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불타오르는지, 어디서 한때 사랑의 대화였던 그 대화가 방해를 받아서 메마르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38. 강론은 대중매체가 전하는 것과 같은 오락의 한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강론은 기념하는 것에 의미와 생명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양식입니다. 왜냐하면 강론은 ‘전례’라는 구조 안에 위치한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론은 간결해야 하고, 연설이나 강의와 모양을 갖춰서는 안 됩니다. 강론을 하는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면 청중의 주목을 끌 능력을 갖고 있을 수 있지만, 그 경우에 그의 말이 신앙의 기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강론이 그렇게 너무 길어지면, 전례 기념에 두 가지 특성 요소, 즉 균형과 리듬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교황께선 성모승청대축일 미사때 하신 강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온 교회와 일치하여, 우리는 성모님께서 육신과 영혼을 지니신 채 천국의 영광 안으로 올라가신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들의 숙명을 보여 줍니다.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처럼, 우리도 또한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에 온전히 동참하도록, 그리고 주님의 영원한 나라를 주님과 함께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1독서에서 선포된, “태양을 입고 ……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묵시 12,1)이라는 “큰 표징”은 하느님이신 아드님 곁에 영광스럽게 앉으신 마리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앞에 열어 놓으시는 미래를 알아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한국인들은 그 역사적인 경험에 비추어 이 국가의 역사와 민족의 삶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모님의 사랑과 전구를 인식하면서, 전통적으로 이 대축일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는,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어 죄와 종살이의 왕국을 무너뜨리시고, 자유와 생명의 나라를 여셨다는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1코린 15,24-25 참조)을 들었습니다. 참된 자유는 아버지의 뜻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단순히 죄에서 벗어나는 일보다 더 크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세상의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길을 열어 주는 자유입니다. 하느님과 형제자매들을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유이며, 그리스도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기쁨이 가득한 희망 안에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오늘 하늘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면서, 우리는 또한 한국 교회의 어머니이신 그분께 간청합니다. 세례 때에 우리가 받은 존엄한 자유에 충실하도록 우리를 도와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하느님의 계획대로 세상을 변모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을 이끌어 주시도록 간청합니다. 또한 이 나라의 교회가 한국 사회의 한가운데 에서 하느님 나라의 누룩으로 더욱 충만히 부풀어 오르게 도와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정신적 쇄신을 가져오는 풍성한 힘이 되기를 빕니다. 그들이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 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빕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빕니다. 생명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모상을 경시하고, 모든 남성과 여성과 어린이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기를 빕니다.

고귀한 전통을 물려받은 한국 천주교인으로서 여러분은 그 유산의 가치를 드높이고, 이를 미래 세대에 물려주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새롭게 회개하여야 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대축일을 거행하면서, 우리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와 일치하여 우리 희망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바라봅니다. ‘성모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운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루카 1,54-55 참고). 성모 마리아께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이기에 복되십니다.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모든 약속은 진실하게 드러났습니다. 영광 속에 앉으신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의 희망이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희망은 “우리 생명을 위한 안전하고 견고한 닻과 같아”(히브 6,19 참조) 그리스도께서 영광 속에 앉으신 곳에 닿게 합니다.

이 희망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복음이 제시하는 이 희망은, 외적으로는 부유해도 내적으로 쓰라린 고통과 허무를 겪는 그런 사회 속에서 암처럼 자라나는 절망의 정신에 대한 해독제입니다. 이러한 절망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 곁에 있는 이런 젊은이들이 기쁨과 확신을 찾고, 결코 희망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들의 자유를 누리며 기뻐할 수 있도록, 그 자유를 지혜롭게 사용하여 형제자매를 섬길 수 있도록, 그리고 다스림이 곧 섬김인 영원한 나라에서 완성될 바로 그 희망의 표징으로서 일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모님의 은총을 간청합시다. 아멘.

2.
이제 보편지향기도입니다. 기도자중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도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기도자가 ‘건국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더군요. 8월 15일을 광복절이기도 하고 대한민국 건국일이기도 합니다. 이명박 정부시절 건국절로 바꾸자는 분들이 목소리를 높혔습니다. 건국절과 통일을 같이 이야기하면 의미는 더욱더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봉헌입니다. 이어지는 성찬의 전례입니다. 모든 미사가 끝나고 파견성가입니다. 사회자가 애국가를 2절까지 부른다고 합니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정진선 추기경이 계시던 2005년부터 광복절때 불렀다는 기록이 있네요.

미사가 끝난 후 명동성당을 걸어나오면서 성당 입구를 보았습니다. 80년대 넓었던 입구는 광장이었습니다. 세상의 아픔과 함께 하는 명동성당으로 인도하는 광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로수로 장식한 계단일 뿐입니다. 성당으로 들어오는 길이 힘듭니다.

건국절, 애국가, 계단. 그리고 염수정 추시경의 글까지 보니 오늘의 명동, 한국 카톨릭의 모습이 느껴집니다. 염수정 추기경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드리는 편지’중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조선일보에도 실린 편지입니다.

“교황님! 우리나라는 60여년이 넘도록 남북으로 분단되어 아직도 대결과 분열의 상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생사도 모른 채 남북으로 갈라져 이산가족의 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교황님! 세월호 참사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들을 위로해 주시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도 어루만져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슬픔에 잠겨 우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상처받은 이들을 안아 주십시오. 교황님의 애정 담긴 환영의 몸짓이나 행동은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공동선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입니다.(이탈리아와 알바니아의 예수회 학교 학생들과의 만남·2013년 6월 7일 바오로 6세홀)

그러나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해 우리 신앙인 각자가 먼저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활동이 서로의 잘못을 탓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비난하고 배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삶 속에서 예수님을 구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예수님의 복음을 바탕으로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통하지 않고 복음이 목적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외치는 소리는 모두 덧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중에서 “공동선을 구현하기 위해 우리 신앙인 각자가 먼저 명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활동이 서로의 잘못을 탓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비난하고 배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시국미사에 나선 사제단을 윽박했던 추기경의 행동이 겹칩니다. 세월호 진상규명에 나선 이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박근혜 대통령을 비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비슷한 취지의 글이지만 강우일 주교님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과 한국 주교들의 만남 시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의 환영사입니다.

이곳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66년이 흘렀습니다. 1950년에 시작되어 3년 동안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낸 참혹한 남북 간의 전쟁 이후 전투는 오래 전에 그쳤지만 남북은 아직도 정전 상태에 있고 군사 분계선 양측에는 가공할만한 무기를 서로 배치하고 언제라도 전투를 재개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땅에는 1천만 명이 넘는 가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진 채 반영구적인 이별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66년 동안 남과 북의 주민들은 한 민족이고 한 언어를 구사함에도 불구하고, 정치 체제가 다르고 사회적 이념이나 경제적 상황도 다르고 문화적 이질감도 갈수록 커져서 이제 갑자기 통일이 된다 하여도 우리가 한 형제 한 이웃으로 반갑게 인사하고 따뜻하게 끌어안을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과 우려가 앞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반도는 동북아시아에서 세계의 열강들이 격돌하는 꼭지점이기도 합니다. 또한 최근에는 동북아의 각 나라마다 국가주의적 경향이 증대되어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워서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무력증강에 갈수록 더 많은 지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무력으로는 아무런 해결도 얻을 수 없는데 말입니다. 동북아시아는 자국만의 번영이 아니라 함께 공영하는 공존의 이상과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동북아의 각 나라는 함께 협력하고 보완하면 얼마든지 함께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전진할 수 있는 지혜와 역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하가 방문해 주신 한국 사회는 국내적으로는 다른 개발도상국이 부러워할 정도로 지난 반세기 동안 급속한 산업화, 민주화와 복음화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급속도의 변화는 적지 않은 부작용과 치유되지 않은 많은 상처를 동반하였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로 국가 전체는 부를 축적하여도 낙수 효과는 없고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되어 많은 시민들이 일자리 불안과 사회보장제도의 부족으로 죽음에 이르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교회도 급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복음적인 교회공동체를 만들었는지를 성찰하면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우리는 성하 앞에 자랑하고 축하받기보다는 당신의 위로와 격려를 더 많이 필요로 하는 백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백성은 어느 때보다 같은 시민들 사이, 같은 민족 사이에 나눔과 화합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북아시아 전체가 민족들 간의 평화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아내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명동성당은 관광지가 되었다.”

저도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명동성당의 미사는 봉헌(돈)을 받기 위한 장식일 뿐이다.”

명동성당 지하에 안치된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명동성당 앞에서 시대에 저항한 분들을 기억합니다. 딱 여기까지만 기억하고 오늘의 명동성당은 잊을까 합니다.

3.
오늘 시복미사가 끝나고 교황이 떠나시면 한국가톨릭은 달라질까요? 한국 가톨릭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은 인구 대비 가톨릭 신자가 5%인데, 목동은 20%가 넘는다고 한다. 길 하나 사이로 소득수준에 따라 신자 차이가 많다는 것이다. 부자들만 주로 성당에 다니는 현상을 어떻게 보는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은 선교를 위함이기보다 그리스도의 신앙 자체가 명령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사회의 불의로 인해 소외당한 이들에게 사회정의를 구현하도록 명한다. 그런데 빈민들이 가톨릭교회에서 소외를 당하는 것은 교회가 사회정의의 구현을 소홀히 하고 있고 무능하다는 징조다.”
‘빈민 사목’ 박문수 신부가 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중에서

주교회의 주교단과 만남에서 교황께서 하신 연설입니다. 사제들의 역할을 강조하셨지만 평신도들의 역할 같으리라 생각합니다. 깊은 묵상으로 이끕니다.

사랑하는 형제 주교님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큰 사랑으로 인사 드립니다. 강우일 베드로 주교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으로 해 주신 형제적인 환영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 교회의 활기찬 삶을 직접 보게 된 것은 저에게 커다란 복입니다. 목자로서 여러분은 주님의 양 떼를 지키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을 지키는 분들입니다. 지키는 것은 특별히 주교에게 맡겨진 임무의 하나로, 곧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교직을 받은 형제로서, 이 나라에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임무의 두 가지 중심 측면을 성찰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기억의 지킴이가 되고 희망의 지킴이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들의 시복은 순교자들이 뿌린 씨앗으로 이 땅에서 은총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후손이고, 그리스도 신앙을 영웅적으로 증언한 그 증거의 상속자들입니다. 또한 평신도들에게서 시작되어 여러 세대에 걸친 그들의 충실성과 끊임없는 노고로 크게 자라난, 매우 비범한 전통의 상속자들입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과 직접 만나 시작되었다는 것은 뜻이 깊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에는 아름다움과 진실성이 있어서, 복음과 복음의 요구, 곧 회개, 내적 쇄신, 사랑의 삶에 대한 요구가 이벽과 첫 세대의 양반 원로들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메시지에, 그 순수함에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추구해야 합니다.

복음이 뿌려진 한국 땅이 얼마나 비옥했고 신앙의 선조들이 전해 준 유산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는, 오늘날 활기찬 본당 사목구와 교회 단체들의 번창에서, 탄탄한 교리교육 과정에서, 젊은이들과 가톨릭 학교, 신학교와 대학교에 대한 사목적 관심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국가의 정신적 문화적 생활에 대한 역할과 선교에 관한 힘찬 열정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선교지에서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편 교회는 여러분이 세계에 파견한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은총을 기억하고 고이 간직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 기억으로부터 영적인 자산을 꺼내어, 앞을 내다보는 지혜와 결단으로 미래의 희망과 약속과 도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잘 아시듯이, 한국 교회의 삶과 사명은 궁극적으로 외적, 양적, 제도적인 잣대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명한 복음의 빛과 그 부르심에 비추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촉구에 따라 판단하여야 합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이란, 성장시켜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1코린 3,6 참조) 깨닫고, 동시에 성장은 과거처럼 현재에도 고난을 이겨내며 끊임없이 일하는 그러한 노고의 열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순교자들과 지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억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이상화되거나 “승리에 도취”된 기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과거만 바라본다면, 우리가 앞으로 길을 나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적 진전을 가로막거나 실제로 멈추게 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을 넘어서, 여러분은 또한 희망의 지킴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복음이 가져다 주는 희망, 순교자들을 감격시킨 그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세상에 선포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물질적인 번영 속에서도 어떤 다른 것, 어떤 더 큰 것, 어떤 진정하고 충만한 것을 찾고 있는 세상에 이 희망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 사제들은 여러분의 성화 직무를 통하여 이 희망을 제시하십시오. 이 성화 직무는 신자들을 전례와 성사 안에 있는 은총의 샘으로 이끌어 줄 뿐만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라는(필리 3,14 참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행동하도록 끊임없이 재촉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친교 안에서 성덕의 불꽃, 형제적 사랑의 불꽃, 선교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게 함으로써 이 희망을 지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여러분이 언제나 여러분의 사제들 곁에 머무를 것을 부탁합니다. 날마다 일하고 성덕을 추구하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그들의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시오.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그들의 아낌없는 봉사에 감사를 드린다고, 저의 사랑에 넘치는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선교하는 교회,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교회, 특히 이 시대 사회의 변두리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라는 도전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를 받아들이고 그 지체 하나 하나와 동화되는 데에 “영적인 맛”을 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68항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공동체는 어린이들과 노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노인들의 기억과 지혜와 경험, 그리고 젊은이들의 열망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희망의 지킴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하여 젊은이들의 교육을 특별히 배려하여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대학교만이 아니라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모든 단계의 가톨릭 학교가 지닌 근본 사명의 수행을 뒷받침해 주십시오. 거기에서 젊은이들의 정신과 마음이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사랑 안에서 자라나고, 또 좋은 것, 참된 것, 아름다운 것 안에서 자라나서, 그들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정직한 시민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희망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으며, 특히 난민들과 이민들,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시행하여, 한국 교회의 예언자적 증거가 끊임없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심은 구체적인 자선 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 그것도 꼭 필요한 것이지만 ― 사회, 직업, 교육 수준의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사업적인 차원으로만 축소시키고,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자신의 인격과 창의력과 문화를 존엄하게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교회의 풍요한 유산인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라는 사도 시대의 이상은 여러분 나라의 첫 신앙 공동체에서 그 생생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상이 미래를 향해 순례하는 한국 교회가 걸어갈 길에 계속 귀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얼굴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의 얼굴일 때에, 그분의 신비체의 친교 안에서 언제나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예수님의 마음에 늘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이끌려올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예언자적인 복음의 증거는 한국 교회에 특별한 도전들을 제기합니다. 한국 교회가, 번영되었으나 또한 매우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에서 살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목자들은, 기업 사회에서 비롯된 능률적인 운영, 기획, 조직의 모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공과 권력이라는 세속적 기준을 따르는 생활양식과 사고방식까지도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준보다 우선하여 취하려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십자가가 이 세상의 지혜를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잃어 헛되게 된다면, 우리는 불행할 것입니다! (1코린 1,17 참조)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 사제들에게 권고합니다. 그러한 온갖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성령을 질식시키고, 회개를 무사안일로 대체하고, 마침내 모든 선교 열정을 소멸시켜 버리는 그러한 정신적 사목적 세속성에서 하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빕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93-97항 참조).

사랑하는 형제 주교 여러분, 기억과 희망의 지킴이가 되는 여러분의 사명에 관한 이러한 묵상으로, 저는 한국 신자들의 일치와 성덕과 열정을 증진하려고 노력하시는 여러분에게 용기를 북돋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기억과 희망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미래를 향해 이끌어 갑니다. 제 기도 안에서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겠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은총의 힘에 의지하십시오.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고 여러분을 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2테살 3,3). 순교자들이 씨앗을 뿌리고 가톨릭 신자들이 대대로 물을 주어, 이 나라와 세상의 미래를 위한 약속으로서 여러분에게 전해진 신앙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기도로 이 땅에서 활짝 피어나기를 빕니다. 여러분에게, 그리고 여러분의 사목과 보호에 맡겨진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다하여 저의 교황 강복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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