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속의 여의도

1.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여의도에서 밥 먹고 다닐 줄 정말 몰랐다.”

저는 영등포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영중초등학교입니다. 평준화시절 뺑뺑이 돌려 여의도에 있는 학교로 배정받으면서 여의도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75년에 여의도 중학교, 78년 여의도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입학할 때만 해도 여의도가 어떤 곳인지 몰랐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인지도 몰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가끔 놀러가서 스케이트를 즐기던 샛강만 어찌보면 유일한 기억입니다.

위의 사진은 1975년 시범아파트가 들어설 무렵 여의도입니다. 막 개발을 시작하는 순간이라 학생들이 부족하여 외부의 학생을 배정하여 학생수를 맞추었습니다. 우측 중간쯤 아파트뒤로 작은 건물이 있습니다. 바로교입니다.(^^)

2.
여의도공원이 들어선 자리는 70년대 여의도광장이 있었습니다. 5.16광장이라고 하고 가끔 반공궐기대회를 열었습니다. 당연히 여의도에 있는 학생들을 동원합니다. 무슨 소리인지도 잘 모르는데 나오라고 하고 나가서 출석체크를 합니다. 아! 5.16광장에서 열린 행사가 더 있습니다. 국군의 날 행사, 기독교인들이 모인 부활절예배. 군사통치 시절 허가받을 수 있는 집회란 관제행사뿐입니다. 만남과 소통이 있는 광장은 5.16광장에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여의도광장이 어떻게 소비되었는지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진이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던 81년 전두환정부시절 국풍81이라는 행사입니다.

여의도의 내력을 쫓아가면 어느 시점에 관제동원으로 대중조작을 하던 시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시절이 여의도에서 보낸 학창시절입니다.

학창 시절을 여의도에서 보냈지만 여의도광장 넘어 서여의도로 가본 일은 없습니다. 통학은 버스입니다. 영등포시장에서 승차하여 영등포로타리를 거쳐 시범아파트를 지나 여의도 중고등학교앞에 내립니다.

걸어서 통학하는 것말고 또다른 수단이 있었습니다. 자가용이 귀하던 시절 여의도과장을 달리는 차는 많지 않았습니다. 하교길. 걸어서 지금은 LG트윈타워가 있는 곳까지 걸어갑니다. 길을 건너서 손가락을 올립니다. 여의도광장에서 히치하이킹입니다. 물론 성공확률은 많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보통은 걸어서 하교합니다. 하교길은 지루하지만 목적이 있었습니다. 넓은 허허벌판에서 돌을 몇 개 쌓아놓고 축구를 합니다. 넓고 넓은 허허벌판위로 모래바람이 날립니다. 서울근교에서 이런 느낌을 주었던 곳이 없습니다.

어린( ) 시절 여의도는 좁지만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여의도에서 6년의 학창생활을 마칠 때쯤이면 하나씩 둘씩 건물들이 늘어나고 축구공을 차던 공터도 사라집니다. 여의도에 증권거래소도 생기고 63빌딩도 등장합니다. 여의도 증권거래소가 보이는 것으로 짐작할 때 79년이후 모습입니다.

3.
학창시절 기억에 남아 있는 마지막 여의도는 최루탄가스냄새입니다. 80년 5월 민주화의 봄을 알리는 시위가 서울 곳곳에서 벌어집니다. 지금 생각하면 서울역집회를 위하여 한강 남쪽에 있던 대학생들이 여의도광장을 지나 마포대교로 나아가려고 한 듯 합니다. 경찰을 최루탄을 쏘면 막았고 최루탄냄새는 바람을 타고 교실까지 날라왔습니다. 세상의 모순을 느낀 첫번째 순간입니다. 교실안에 광주라는 이름이 가끔 들립니다.

그러나 고3. 시험 공부를 하여야 합니다. 졸업을 하고 대학을 다니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 우연히 한국증권전산(현 코스콤)과 함께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몇 십년만의 여의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마지막 기억과 짜맞추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더군요. 중고등학교,시범아파트 그리고 여의도광장정도만 스쳐지나갑니다. 그 때부터 20년이 되어갑니다.

설연휴 ‘세시봉과 친구들’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70년대중반 크리스마스때가 되면 방송국에서 송창식,윤형주,김세환,양희은의 콘서트를 방송하였습니다. 그 때 들었던 노래들은 다시 들었습니다. 70년대의 기억이 세시봉을 통하여 전달되었습니다.

“아! 그시절에 이런 아름다운 노래도 있었고 멋진 가수들이 있었구나”

큰 딸도 좋아합니다. 요즘 가수들과 또다른 매력을 준다고 좋아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은 과거의 아픔을 잊는가 봅니다. 여의도에서 가졌던 마지막 기억인 최루탄은 70년대가 남긴 아픔의 상징입니다. 저는 오십이 훌쩍 넘은 세대들이 가진 아픔을 80년대의 아픔으로 기억합니다. 국풍81, 대학가요제가 한 시대를 상징하듯 대학의 노래패와 저항가요는 또다른 시대를 상징합니다.

어제 읽었던 한겨레신문 김선주씨의 글로 추억여행을 마무리합니다.

나이 들어 과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온 길 돌아보지 않고 갈 길만 생각하자고 다짐했지만 그 갈 길 앞에 온 길이 다시 버티고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박근혜 대세론과 국민투표와 70년대 금지곡이 오버랩된 탓이다. 박근혜는 인혁당 사건이 수십년 지나 무죄가 되자 ‘거짓이고 모함’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국 남부의 명문 사립대 에머리대학은 어제 노예제도와 관련된 대학의 설립 과정에 대해 사과하고, ‘잘못된 역사를 인정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70년대에 내 젊음을 두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 노래 때문이다. 세시봉 이야기 때문이다. 시퍼렇게 기억이 살아남아 70년대처럼 가슴을 옥죄고 살벌했던 시절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세시봉에 감동을 느꼈던 젊은 세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70년대를 기억하라고. 그 살벌했던 유신시대를, 세시봉 바깥세상의 노래 이야기를, 그때가 어떤 세상이었는지를.
[김선주 칼럼] ‘세시봉’ 바깥세상 이야기중에서

4 Comments

  1. 빨간펜

    저는 김선주씨보다 훨씬 어린 세대지만, 저 칼럼을 읽고나서 뒷통수가 울릴 정도는 아니지만, 꿀밤을 맞은 느낌이었습니다.^^…한가지 작은 부탁…”최류탄”->”최루탄”으로..ㅎㅎ;;;

    Reply
    1. smallake

      오늘도 빨간펜으로 쭉~~~ 긋고 가시네요.(^^)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Reply
  2. PB

    안녕하세요 여의도 흑백사진이 정말 멋있습니다.
    혹시 여의도 대지조사 자료에 저 사진을 인용해도 괜찮을까요??

    Reply
    1. smallake (Post author)

      저도 인터넷에서 받은 사진이라 저작권이 없습니다. 사용하셔도 무방할 듯 하지만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Reply

빨간펜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