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정보운동의 성과와 과제1

1998년에 쓴 글입니다. 동향과 전망에 기고한 글입니다. 참으로 오래전의 글입니다.
지금까지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 현재까지 여러가지 일을 했는데.학생운동을 하다고 군대갔다와서 노동운동을 하였고 그리고 정보통신운동을 하였습니다.그리고 그것이 업이 되어 현재는 SW회사를 경영하고 있죠.  사실 노동운동을 몇년했던 일이나 정보통신운동을 몇년했던 경험등을 다 글로써 – 역사라는 형태로 정리해서 발표를 했었습니다. 이글도 본격적으로 회사경영을 하기전에 마지막으로 91년부터 98년까지의 경험을 정리하였던 글입니다. 지금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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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정보운동의 성과와 과제(The History and Prospect of the Progressive Communication And cyberliberty Movement In Korea)

Copyleft by 김형준(PC통신 참세상)
Kim, Hyoung Jun(Executive Manager of Truenet for the hamane world)

현재 정보운동은 걸음마단계이다. 아직 하나의 사회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을 정도의 조직력이나 시각을 갖고 있지못한게 사실이다. 따라서 이글도 이런 한계를 반영하여 정보운동의 정립된 시각을 보여주기보다는 정보운동이라는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그속에서 제기된 다양한 의미를 소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1. 진보적 정보운동이란

90년대 후반을 장식하는 화두가 정보화이다. 정보화가 과연 우리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지말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없이 누구나가 정보화가 우리의 살 길인양 주장하고 있다. 물론 정보화가 사회적 변화를 근거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적인 공세만은 아니다. ‘정보화’ 혹은 ‘정보사회’의 근간이 되는 디지탈기술혁명은 70년대이후 자본 주의적 모순해결 방식의 일환으로써 추진되어온 과학기술혁명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지만 디지탈혁명은 ‘정보고속도로'(Information superhighway) 및 그것을 포함한 컴퓨터 통신을 중심으로 한 뉴미디어와 디지탈 화된 정보의 등장으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고 있기도 하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진행되고 있는 자본간의 국제적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 한 자본의 몸부림이면서 국제적인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생산과 유통 및 소비를 가장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정보화밖에 없기때문이다.정보화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진행되면서 사회구조 및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공영의 자산에서 상품으로 변해버린 정보 를 독점하고 이를 유통하게끔 하는 매체를 독점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함으로써 미디어와 자본이 합친 새로운 권력형태(Media-Industrial Complex)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제 자본은 산업화라는 화두대신에 정보화를 내걸고 사회에 지배와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정보화는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나타난 필연적인 산물이기에 “정보의 독점심화과 독점으로 인한 사회적 통제와 감시의 강화 “라는 정보화사회의 모순에 맞서는 운동을 진보적 정보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2. 진보적 정보운동의 흐름

(1) 정보운동의 맹아, 동호회운동과 사설BBS운동

모든 운동의 현재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선 현재를 있도록 역사를 정확히 해석하여야 한다. 가상공간에서 벗어나 현실속에서 자기목소리를 내기시작한 정보운동도 역시 지난 5여년에 걸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땀의 결실이다.

사설BBS와 진보운동, 독립네트워크를 향한 최초의 시도들

어느 나라건 정보운동의 출발은 컴퓨터로 매개된 가상공간(PC통신이나 인터넷)이었고 이속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하고 활동하는 소위 네티즌이었다. 우리나라 정보운동의 역사는 PC통신=BBS의 역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 사설BBS는 1988년에 처음 탄생되었다. 이는 국내 사설 BBS가 특정
그룹이 아닌 일반 대중을 상대로 상업BBS보다 먼저 개방된 것으 로 PC-VAN(천리안 전신)이나 케텔(하이텔 전신)보다 약 1년 앞선 것이 다. 물론 이를 이용하던 사람들은 당연히 정보통신 관련 기관에 소속된 사람이거나 컴퓨터통신에 대단한 관심을 가진 특정계층일 수밖에 없었다.
1989년 초까지 바이트 네트, 달구벌 네트 등 서너개에 지나지 않던 BBS는 1989년 5월에 엠팔 게시판이 개설된 이후 약 7개로 늘어났다가, 매달 그 수가 급속도로 늘어나서 10월 중까지 70개로, 11월 초에는 90 개로, 그리고 12월에 이르러 드디어 100개를 넘기게 되었다. (이즈음 미국에는 1989년도에10,000여개에서 1990년에는 16,000여개로 증가하 였으며, 일본의 경우는 1989년까지 약 1,000여개의 전자게시판이 있었 다). 1991년도 이후 국내 BBS역사상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것이 하나 있 다. 그것은 호롱불네트라는 미국의 화이도네트와 같은 풀뿌리통신망의 탄생이다. 호롱불 네트에는 91년 11월까지 총 81개국이 망에 가입되어 있었다. 소집 단들의 새로운 의사소통방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던 사설BBS=풀뿌리 BBS운동 에 진보운동도 이때부터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평화 만들기BBS(민중교회김거성목사님 운영)와 사당의원에서 운영하였던 북 소 리BBS(지금은 운영중단)가 있었고 대우자동차노동조합에서 운영한 대자보BB S(현재 운영중단)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이런 진보적인 사설BBS는 소통을 목적으로 하거나 정보화사회에 대한 나름대로 의 인식에 근거한 활 동이라기 보다는 억압된 사회현실에서 자유로운 의사소 통을 바라던 몇몇의 사람들이 현실의 간섭없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찾으려고 했던 결과이며 민족민주운동이나 노동운동의 자료를 서로 나누는 “온라인자료실 “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한민동이 바통모가 되기까지 – 진보적 동호회운동의 출발

우리나라 정보운동에서 바통모로 표현되는 진보적인 동호회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진보적인 온라인동호회라고 할 수 있는 바통모의 역사는 80년 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케텔(Ketel 지금의 하이텔)에는 [내외통신] 과 [매일경제]의 뉴스만 서비스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88년 10월 [한겨레] 신문 이 창간되면서 진보적 통신인들은 한국PC통신 측에 [한겨레] 기사도 함께 게재 해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요구는 거절당하고, 일부 통신인들은 직접 [한겨레] 기사를 타이핑해서 케텔 게시판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런 통신인들이 모여 처음엔 [한국민주통신동호회](약칭한민동)라는 단 체를 결성, 200명의 발기인을 모아 동호회로 만든다는 목표로 준비작업에 들어갔고 바른통신모임이라는 이름의 동호회로 탄생하였다.

(주1) 바통모는 발 기문(창립선언문)(주2)에서 밝힌 바 대로 이용자운동으로써 진보적인 정보 제공자로 서의 역할을 선언하고나섰다.

전통적인 운동방식과 뉴미디어적인 운동방식

사회의 여론형성과정이 철처하게 자본 혹은 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우리나라의 미디어환경에서 시민사회운동은 항상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 해왔다. 소위 “대항매체”라는 시도였고 가상공간내의 진보적 동호회는 민중운동이 확보한 “새로운 정보소통공간”이었다. 하이텔 바른통신모임이 사회분과게시판이 그런 역할을 담당하였고 천리안 희망터, 현대철학동호회 해당게시판도 역시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 권력과 자본에 의해 검열당하지 않는 정보소통공간으로서의 동호회운동을 정의하는 것은 “정보제공측의 문제를 보면, 일상의 정보를 제공하는 데이타 베이스가 일정한 정치적 입장에 의해 편향되어 있고 그것은 교정불가능한 하 나의 상품으로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사회 적으로 긴요한 자료는 여러가지 명목으로 공개되지 않는 가운데, 소비를 위한 정보만이 판매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왜곡된 통신정보의 활성 화는 결국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보의 확산이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경 제적 이해관계가 통신 영역에 침투함을 의미합니다…”(주3)라는 입장에 충실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은 항상 “진보적인 데이타베이스의 구축”이라는 화두에 집착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사실이 사실대로 전달될 수있는 공간이 중요하지만 사실을 넘어 문건에 대한 집착이나 문건의 유포가 바로 운동이 출발이라는 사고는 ‘쌍방향’을 그 기본적인 특징으로 하고 있는 통신 공간 의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무차별적인 대중에게 유인물을 살포 하는 것과 같은 활동의 연장선 상에서 PC통신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93~4년을 전후하여 사회운동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가 상공간을 이용하였던 학생운동에서 나타났다.

“93년도 후반기에 있었던 94년도 각 대학 총학생회장 선거에 즈음하여 각후보 진영들에서는 하이텔과 천리안 등의 BBS에 아이디를 만드는 붐이 일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게시판과 진보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동호회들의 게시판 상에 각 후보들의 정책과 공약 등의 문서들을 올려놓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 한총련에서도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아이디를 만들어서 여러가지 홍보활동을 벌여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곧게시판 상에서는 한총련을 비롯한 ‘운동권’혹은’빨갱이 집단’들을 증오하는 ‘애국적 우익인사’들과의 논쟁(사실상은 쓸데없는 말싸움)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는데, 말싸움을 통한 쓸모 없는 소모전이 계속되면서 곧 통신공간에 대한 매력도 함께 사라졌는지 게시판에서 이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주4)

(2) 통신을 통한 운동이냐 통일을 위한 운동이냐

정보운동의 역사속에서 아주 고전적이면서(? ) 지금도 지속되는 논쟁이 하나 있다.소위 통신을 통한 운동이냐 통신을 위한 운동이냐라는 논쟁이다.이런 논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94년부터 95년사이이다. 진보적 동호회운동의 주체들이 사회운동과 직 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조건에서 이런 논쟁은 필연적 이라고 할 수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이 표출된 배경을올바로 이해하자면 가상공 간을 둘러싼 상황적 변화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우선 92년을 전후로 하여 통신공간이 더욱상 몇몇의 청년학생들의 공간이 아니라 대중적인 공간인 동시에 시민사회운동에게도 열린 공간으로 등장한것이다. 사실 문민정부이전까지만 해도 가상공간은 시민사회운동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앞서 Ketel시절 한민동이 동호회로 등록하지 못한 이유도 그런 이유이다. 그러나 문민정부이후 시민운동이 YS정권의 파트너로서 인정받으면서 가상공간은 점차로 시민사회운동도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다.10여개의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설한 열린정책회의를 시작으로 하여YMCA, 공선협과 같은 시민단체들이 가상공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더구나 나우콤이라는 제3의 PC통신사업자가 등장하면서 가상공간은 시민운 동뿐 아니라 민중운동에게도 열린공간으로 자리잡아 나갔다. 또 하나는 풀뿌리소통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던 사설BBS들이 대기업의 경쟁적인 영업전략에 밀려 하나둘씩 상업통신망의 동호회 혹은 작은 모임으로 편입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사설BBS라는 형식으로 이어져온 소단위의 독립네트워크운동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시민사회의 공적공간이 상업적 공간으로 포섭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PC통신은 우리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매체로 등장하였고 아직은 권력과 자본의 간섭을 받지 않는 가상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활동할 것인가라는 논쟁이 등장하게 되었다. 먼저 통신운동을 통신을 통한 운 동이라고 규정한 의견을 살펴보자.

” 진보적 pc통신 활용이라는 말속에는 pc통신을 통해 진보를 구현한다는 의미와 pc통신 자체의 진보적 성격을 올바로 파악하여 활용한다는 두가지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두가지는 결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상호보완적이다. 진보라는 목적을 pc통신을 활용하여 달성한다는 pc통신을 수단적 의미로 보는 전자의 개념은 ‘pc통신 수단론’으로 볼 수 있으며, 구미디어와는 구별되는 pc통신의 쌍방향성이나, 시공간적 비제한성등의 속성에 근거하여 pc통신에 의해 구현되는 가상공간을 대안 민주주의의 실현장이라고 보는 ‘pc통신 목적론’으로 후자를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중 어느 하나만을 중요시한다면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주5)

이에 대해 통신에 대한 통신운동을 주장하는 측이 통신을 통한 운동을 비판하 는 내용은 “이와는 다른 의견인 이는 다시 말하면 ‘쌍방향’을 그 기본적 인 특징으로 하고 있는 통신 공간 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무차 별적인 대중 에게 유인물을 살포 하는 것과 같은 활동의 연장선 상에서 PC 통신을 활용하 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사람이 하이 텔이나 천리안을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장이 담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현실 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은 통신 공간이 쉽게 자신의 선전 사업의 위력적인 도구가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합니다. 그러나 통신공간이 TV 나 신문과 다른 점은, TV나 신문이 어느 한쪽 의 메시지를 수동 적인 대중 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데 비해 통신 공간은 그야말로 ‘공간’이 라는 말이 어울리게끔 사용자들이 서로의 의견 교환을 통해 만들어 가는 매체라는 점이다. 게시판에 올리거나 메일로 보낸 글은 자신이 원해야만 그 내용 을 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제대로된 선전선동이 되려면 지속적 이고 도 안정적인 되먹임(feed back)이 필요한데 이러한 통로를 열어주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단방향적인 작업은 불안정하며 그 효과를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통 신은 생각하는 것만큼의 ‘도깨비방망이’는 아닌 것이다. 더 구나 통신 공간에서 보내지는 메시지들은 직접적인 인간적 접촉이 없이 글 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길거리에서 유인물 하나 를 손에 쥐어주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 을 수도 있다. ” (주6)

이렇게 통신에 의한 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벌인 활동을 이용자운동이라는 범주로 설정할 수 있고 문화운동적 성격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 정보운동이란 컴퓨터 통신을 이용 혹은 대상으로 하는 초기의 ‘통 신운동’이라는 개념으로부터 특화된 부분으로서 ‘정보’ ‘정보통신’에 대한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자본과 국가에 의한 정보의 통제와 독점’ 에 대하여 저항하며 진정한 ‘전자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것을 그 목표 로 한다.

– 통신예절운동이나 올바른 게시판과 자료실에 대한 사용방법 등을 알려내고 통신안에서 올바른 논의구조가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일 종의 이용자계몽운동

– 현재는 소비자운동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곧 생산자운동으로 전환 하리라고 예상되는 통신 이용자운동

– 점차 상업화 해나가는 정보들을 공공정보의 확대를 통하여 정보의 상업화를 저지하고 일반 이용자들의 정보접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자 본의 정보독점을 막아내는 활동

– 통신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소통의 자유 등에 대한 규제에 대해 저 항하며 국가정부에 의한 정보통제를 약화시키고 보다 진보적인 흐름 들이 방해받지 않도록 보위하며 전자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어 가는 활동.

– 각 언론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는 정보화사회의 본질 을 감추고 나타나는 미래학류의 자본주의적인 정보주의(정보를 잡는 자가 권력을 잡는다. 이제 계급은 없다 따위)나 테크노피아 등의 환 상유포, 대안없는 비관론 등에 맞서 정보산업을 토대로 하는 후기정 보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을 밝혀내고 대항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활 동.

– 일반 진보진영내의 미숙한 통신활동을 보조하고, 기층 민중들에 대한 컴퓨터 교양사업등의 지원 활동. “(주7)

실제 바통모의 경우 조회수제도개정운동(주8)을 전개하였고 36시간 하이텔 동호회 시스템 정지문제, 게시물의 부당한 삭제문제, 통신예절운동 등에 대해 문제 제기 활동을 한 적이 있다.

(3) 연대의 모색과 좌절

미국정보운동의 출발은 미국EFF(Electronic Frotier Foundation)의 결성으로부터 시작된다. EFF는 1990년 로터스사(Lotus Development Corp.)의 미첼 카포 (Mitchell Kapor)와 디지틀 전도사 존 페리 밸로우에 의해 설립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FBI가 큰 역할(? )을 하였다. 사이버 범죄를 수사하고
있 는 FBI 특별수사요원은 존 페리 밸로우를 매킨토시 롬(ROMs)에서 사용되는 소스코드를 훔친 정보 테러리스트 그룹-‘ 누프로메터 우스 연맹(NuPrometheus League)’의 일원으로 지목한 것이었다. 존 페리 밸로우는 이 대목에서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전에 ‘무엇이 범 죄이고 무엇이 범죄가 아
닌가? ‘를 그에게 먼저 설명해 야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해프닝을 전자게 시판에다 올려두었는데, 이로 인해 로터스 1-2-3의 아버지 미첼 카포 역시 같은 혐의로 FBI의 방문을 받 았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이들이 서로 만나 수시간 대응책을 논의한 결과물 이 바로 EFF의 탄생이었다. 이들은 정보사회의 컴퓨터 기반 통신(Computer- Based Communications)의 영향으로 야기되는 각종 법적/사회적 이슈에 공동 으로 대처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하기로 약속하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9) 우리나라의 경우상업B BS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진보적 동호회운동과 이공계열대학에서 단초 적으로 이루어졌던 과학기술운동의 한부분으로서 정보운동소모임이 연대하 게 된 계기도 국가보안법이었다.

PC통신을 이용하는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PC통신의 사회적 영향력은 높아졌다. 또한 PC통신을 활용하는 사회운동이 많아지면서 국가권력은 서서히 개입을 시작하였다. 그 출발이 93년 12월에 일어난 천리안 현대철학동호회 김형렬회 장의 구속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가상공간에 대해 불간섭정책으로 일관하던 국가권력이 개입정책으로 전환하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사건의 추이는 이렇다.

” 93년 11월 현철동의 회장 김형렬님이 통신망에 이적표현물을 게시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이후 94년 2월 희망터 회장 이창 렬님 포함 4명이 구속되어 3월 6일에 희망터와 현철동의 운영진 모임이 있 었고 94년 3월 현대철학동호회 임시 회장 권한 대행인 김 영선님이 또다시 구속되었습니다. 그래서 3월 13일 희망터, 현철동 위주의 통신탄압저지를 위한 대책회의가 결성되었고 같은 날 현대철 학동호회 진상호님이 불법연행 후 구속되었습니다. ”

이 사건으로 하이텔의 바통모, 천리안의 현철동, 희망터, 바른정보 실현을 위한 모임가 공동으로 통신탄압저지를 위한 대책회의를 94년 3월에 결성하였다.” 대책회의는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원하는 각 동호회 및 통신 단체들의협의회 형식으로 만들어서 공안당국의 탄 압에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상설적인 기구를 변해나갔고 현재까지의 통신 상에 행해지고 있는 탄 압을 알려내고 부당성을 선전하는 일”을 하였다. 이런 활동을 토대로 결성한 모임 이 “민주통신을 위한 PC통신단체협의회(준)(이하 민통협)”였다. 그러나 민통협은 정보운동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세워 내지 못한채 흐지부지 끝났 다. 아직 각 동호회별로 정보운동에 대한 참여가 높지 않았고 추진주체들 또한 명확한 전망을 세우지 못한 가운데 추진된 민통협은 결국 일회적 인 행사로 끝나게 되었다.

민통협논의가 실패로 끝난 이후 바통모를 중심으로 정보화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소모임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바통모 출판소모임인 “전환의 좌표”(주10)이다. 전환의 좌표는 비록 출판소모임이라는 성격을 가졌지 만 정보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과 토론을 게시판을 공개함으로써 정보운 동에 관심을 갖은 많 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물론 정보화라는 화두를 처음으로 제기한 집단을 바른정보사회 실현을 위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92년 대통령선거당시 백기완선거대책본부에 서 전산지원팀을 구성하였던 사람들이 모여 결성한 탄체로써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CPSR강령 및 GNU강령을 번역하여 과학기술운동을 고민하는 이들 에 게 신선한 문제의식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94년이후 공식적인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다.

민통협논의가 흐지부지된 이후 약 1년후 새로운 연대모임에 대한 논의가 시작 되었다. “진보통신단체 연대모임”(이하 통신연대)은 정보통신기술과 진보적 사회 활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여러 통신 단체들이 함께 운영하는 연대모임으로 출발하였다. 통신연대가 만들어진 계기는 95년 가을 진보지주최로 ‘PC통신 단체 좌담회’에서 대면한 여러 PC통신 단체들이 “진보적 PC통신 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함께 풀어가야 할 필요성을 확인했던데에서 출발하였다. 통신연대는 ‘정보통신의 사회화’와 ‘진보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두 가지 느슨한 취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대한 논의와 실천틀로 기능하고 있다. 통신연대가 민통협과 달리 지속성을 가질 수 있어떤 이유는 94년이후 정보운동에 대한 진보적 동호회- 하이텔 바른통신모임, 천리안 현대철학동호회, 희망터,나우누리의 찬우물- 나 CUG 혹은 동호회를 개설한 사회단체- 나우누리 진보청년동우회-들이 정보운동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음에 기인한다.

(4) 본격적인 정보운동의 시작

96년은 정보운동의 자기정립을 시작한 시기인 동시에 분화의 시기이기도 하다. 우선은 정보운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정보기본권운동이 자리매김하였다.

우선 이용자권익운동이라는 소비자운동을 넘어서서 인간이면 누구나가 보편적으로 가져야할 권리 로서의 정보기본권(Cyber-rights)(주11)이 한총련CUG 및 통합전자주민 카드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40 여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정보통신검열철폐를 위한 시민연대” 를 구성하여 한총련CUG폐쇄반대운동으로부터 최근에는 전기통신사업법 시행 령 개악반대투쟁을 이끌면 정통부로 하여금 결국 철회까지를 이끌어내는 성과 를 얻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에선 최초 인권적 차원에서 정보화의 문제 를 조명한 96검열백서를 펴냈다. 정보화와 관련하여 가상공간의 국가보안법 이라고 할 수 있는 전기통신사업법 53조(주12)에 대한 철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프라이버시권을 제기한 통합전자주민카드공대위의 활동도 역시 중요한 의 미를 가진다. “사생활의 보호”로만 이해되는 프라이버시권을 정보화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개인정보의 보호”라는 차원으로 까지 확대시켜 내었다.또하나 01410요금인상에 맞서 자연스럽게 조직된 01410대책위원회와 연대를 통해 보편적서비스 및 공적접근권(주13)을 한 활동도 주목할만 한 활동이 었다. 정보고속도로를 둘러싸고 사회의 각세력이 대립하고 있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경우 초고속통신망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가 없이 자본과 국가의 계획대로 추진되고 있는 상황에서 01410대책위의 활동은 공적접근권에 대한 최초의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개별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어오던 독립네트워크운동이 한국민간단체네트워크협의회로 조직화하였다. 독립네트워크운동(주14)이란 전통적인미디어 운동에서 시도되었던 독립미디어와 같은 연장선에 놓여져 있다. 자본과 권력에 의한 네트워크환경이 상업화, 독점 화로 치 닫고 있는 조건에서 사회의 공공적 영역 혹은 시민적 영역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물론 우리사회에서 시민사회란 말이 사회적 근 거가 있는 개념인지 혹은 사회적으로 유미한지에 대한 판단을 접어두더라 도 민중 혹은 시민이 서로 의견을 자유롭게 주고받고 여론을 만들어나가는 공간(매체)는 매우 중요함하다. 이른바 시민사회운동의 정보인프라구축운동이 라고 할 수 있다. 독립네트워크운동이 시작된지 4년에 접어들면서 최초 사당의원 의 북소리 BBS, 민중교회의 평화만들기BBS로부터 시작된 독립네트워크운동 은 참세상, Ecoserve, KSDN,SING에 이르기면서 보다 많아 지고 다양화하였다. 이런 힘들이 96년 맥브라이드 서울회의를 거치면서 “하나의 기구를 통한 독립네트
워크운동의 전개”라는 방향을 공유하였고 한국민간네트워크협의회 (KACC)의 결성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의 KACC운동은 운동상에서 네트워크가 가질 수 있는 의미인 소통과 연대로서의 네트워크를 복원하고 이러한 정신에 근거하여 시민사회운동의 연대와 소통공간으로 KACC를 만들어 나가려고 한다. 또한 93년을 전후로 사설BBS운 동과는 달리 인터넷을 전개로 하고 있고 국제적인 NGO네트워크인 APC 및 회원네트 워크와의 연대를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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